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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세계사 : 노먼 베쑨 이야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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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먼 베쑨은 의사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무기를 가지고, 즉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그 일을 통해 투쟁했다. 그는 자신의 분야인 의학에서 전문가이자 개척가였다. 그는 자신의 무기를 늘 새로이 날카롭게 갈았다. 그리고 그는 파시즘과 제국주의 반대투쟁의 선봉에 서서 자신의 능력을 초지일관 열성적으로 발휘했다. -쑨원의 아내 쑹칭링의 헌사 중에서
메스를 놓지 않은 혁명가
캐나다 사람으로 태어나 중국인 백구은(白求恩: 바이츄언)으로 죽은 노먼 베쑨은 그야말로 사람과 사회를 고치기 위해 동분서주한 의사였다. 대개 의사로 시작해 사회의 부조리에 눈을 뜨게 된 사람 중에는 수술실을 벗어나 거리에서 정치운동에 나서는 경우가 많은데, 노먼 베쑨은 의사가 된 이래 결코 스스로 의사라는 자각을 놓치지 않았으며 사람과 사회를 고치는 방법 또한 자신의 수술칼을 통해 찾으려 했다. 그는 사회적 부조리를 의료활동 중 깨달았고 이를 통해 차가운 이성으로 자신의 정치색을 정했으며, 그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부와 명예를 마다한 채 이국의 전쟁터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하다 죽었다.
그에게 있어 의사란, 소독약 냄새나는 깨끗한 병원이든 총탄이 날아다니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든 어디서나 사람을 구할 수 있어야만 했고, 나아가 사회 또한 함께 치료할 수 있어야 했다. 그는 자신을 모르모트 삼아 폐결핵을 퇴치하기 위한 치료법을 찾아냈으며 사회활동을 통해 불합리한 의료제도를 개선시켰고, 결국 의사의 손이 가장 필요한 이국의 전쟁터에서 어린 병사들의 생명을 구하다가 죽었다. 인간과 사회가 가진 질병을 고치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한 노먼 베쑨은 자신이 믿는 진짜 의사의 삶을 살아낸 사람이었다.
전쟁의 환멸 속에서 의사가 되다
노먼 베쑨은 캐나다 토론토에서 대대로 의사나 교사, 목사를 직업으로 삼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말콤 베쑨은 목사였는데, 신앙에 있어서 상당히 엄격하고 외골수였던 사람이었다. 말콤 베쑨의 목회활동은 인기가 없어 그다지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신자를 찾아 늘 이리저리 이사를 다녀야만 했기에 경제적 사정은 좋지 않은 편이었다.
노먼 베쑨은 원래 이름이 헨리 노먼 베쑨이었는데, 가운데 이름 노먼은 의사였던 그의 할아버지 이름을 딴 것이었다. 의학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던 할아버지를 자랑스러워했던 헨리 노먼 베쑨은 할아버지 같은 의사가 되기로 일찌감치 결심했고 할아버지가 쓰던 명패를 받아 소중히 간직 했다. 그리고 그는 첫 번째 이름인 헨리보다도 노먼이라고 불리기를 원했다.
경제에 밝지 않았지만 노먼 베쑨의 부모는 그에게 돈이 아닌 인간이 가져야 할 참다운 가치를 가르쳤고, 캐나다의 광활한 대지와 신대륙의 문화는 그에게 모험 앞에 두려워하지 않는 개척정신을 가지게 했다.
토론토 의대를 다닐 당시 노먼 베쑨은 학비를 벌기 위해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사정이 좋지 않으면 휴학을 하기도 했다. 신문팔이부터 견습기자, 기차 판매원, 벌목장의 막노동꾼에 이르기까지 학비 조달을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한 그는 벌목장에서 벌목꾼들과 보낸 시간을 가장 소중히 여겨 그때 찍은 사진을 지갑에 품고 다니기도 했다.
노먼 베쑨의 청년기는 전쟁과 함께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신대륙까지 포화가 미치진 않았으나 당시 세계는 제1차 대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유럽의 혼란으로부터 거리감을 두었던 신대륙이었지만 그러나, 끝내 전쟁을 외면하지 못했다. 노먼 베쑨이 의학박사 과정에 있던 1915년, 캐나다는 1차 대전 참가를 결정했다. 노먼 베쑨은 바로 군에 입대했고 부상병을 옮기는 운반병으로 프랑스 전선에 배치되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있었겠지만, 일부분 낭만적인 생각으로 참전했던 노먼 베쑨은 전쟁을 겪으면서 냉혹하고 무자비한 현실에 눈을 떴다. 그가 나르는 것은 부상병보다는 주검이 많았고 대부분 20세 전후의 청년들이었다. 무의미한 전쟁에 희생되는 어린 생명을 바라보며 그 자신 또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노먼 베쑨은 의학이라는 학문의 세계뿐만 아니라 정치와 사회, 그리고 인간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된다. 그는 전쟁에 대한 환멸을 느꼈고 세상을 전쟁으로 몰아넣는 사회에 대해 절망했다. 그러던 중 노먼 베쑨 또한 자신이 나르던 부상병들처럼 다리에 파편을 맞고 캐나다로 송환되었다.
부상을 극복한 뒤 토론토 대학에서 의학 박사학위를 딴 노먼 베쑨은 영국으로 건너가 의사생활을 시작하였다. 의학 외에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소질이 있었던 그는 신대륙과 달리 원숙했던 20세기 초 유럽문화를 즐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평생의 여인 프란시스를 만나 결혼했다. 프란시스는 스코틀랜드 귀족가문 출신의 지적이고 교양이 있는 여인이었다. 결혼 후 노먼 베쑨은 유럽 대륙으로 건너가 신혼여행을 겸해 2년간 발달된 유럽의 의학을 견학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디트로이트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정착했다.
결혼생활도 개업의로서의 생활도 순탄한 편이었다. 처음 개업했을 때는 병원비 대신 식료품을 받는 등 고전했지만, 노먼 베쑨의 성실성과 실력은 곧이어 많은 환자를 내원하게 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고, 그래서 그 여유와 의술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끔 나누어줄 여유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풍요로워지면 질수록 노먼 베쑨의 마음에는 확연히 잡히지는 않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이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불안한 마음을 미친 듯이 일하는 것으로 메꾸어 갔다. 그러자 결혼생활이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무엇보다도 건강상태가 급속히 나빠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자신의 몸에 큰 일이 생겼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 차렸다. 폐결핵에 걸린 것이다.
生과 死의 갈림길에서 권위있는 폐결핵 전문의로 거듭나다
당시 폐결핵은 그 치료법이 거의 전무한 편이었다.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요양소 같은 곳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일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노먼 베쑨의 폐결핵은 그 진행도 말기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에게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 보였다. 노먼 베쑨은 요양소로 떠나기 전 아내 프란시스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아내를 죽음을 앞둔 환자의 병수발이라는 절망적인 의무로부터 해방시켜주기 위해서였다.
캐나다의 캘리더 요양소에서 노먼 베쑨은 자신의 죽음과 마주하였다. 그러나 마냥 죽을 날을 기다리면서 세월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병에 대해 의학자로서 접근을 시작했고, 이 분야의 선진적인 치료법을 알아냈다. "기흉 치료법"이라는 이 방법은 이론적으로는 성공만 한다면 살아날 확률이 높았지만, 문제는 임상적 결과가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노먼 베쑨은 이 신의학에 자신의 운명을 걸었다. 그냥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 새로운 시도에 자신의 목숨을 내맡기기로 한 것이다. 성공한다면 새로운 인생을 얻는 것이고 실패한다면 의학자로서 의학실험에 일정한 기여를 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시의 폐결핵 전문가들은 노먼 베쑨의 이런 결정을 모두 말렸다. 괜시리 죽음을 재촉하는 만용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노먼 베쑨은 스스로가 모르모트가 된다는 각오로 이 실험에 임했고, 결과는 성공이었다. 노먼 베쑨은 두 달 만에 완치 되었다. 그 자신이 죽음을 앞둔 환자의 입장이 되어 보았던 노먼 베쑨은 누구보다도 폐결핵을 앓는 이들의 심정을 잘 알았다. 그러기에 그는 완치된 결핵 환자들의 사회복귀를 도우면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폐결핵 전문외과의로 새 삶을 시작했다.
그는 누구보다 정력적으로 일했다. 자신이 완치된 경험을 바탕으로 결핵 환자들의 수술에 적극 임했고 그 과정에서 수술 현장에서 필요한 의료기를 개발해내기도 했다. 이는 미국의 의료기회사에서 베쑨의 이름을 달고 생산되어 흉부수술에 혁신을 불러오기도 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선 사회부터 치료해야한다
결핵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기적적으로 살려내며 권위있는 흉부외과 의사로 승승장구했지만 노먼 베쑨은 자신의 성공에 점차로 의혹을 느끼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 살려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결핵으로 죽어가는 현실에 그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그가 의사로 활동하던 퀘벡주는 의료제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아 가난한 사람들은 제대로 된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부자들은 결핵에 걸리면 의사를 찾아와 치료받고 완치되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비싼 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의사 한번 찾아가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노먼 베쑨은 가난한 사람의 결핵과 부자의 결핵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핵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방법은 의료기술 개발도 의미가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의사를 찾는 데 부담을 느끼지 않는 사회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꼈다. 그는 질병보다 가난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더 큰 질병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즈음 그는 학회 참가를 위해 소련을 방문하게 되었다. 공산화된 지 얼마되지 않아 사회의 여러 방면에서 개혁을 추구하였던 소련에서는 당시 서구에서는 정착되지 않았던 국가적 차원의 의료혜택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고 이 의료제도의 실시로 결핵 사망률이 이전보다 절반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노먼 베쑨은 감탄했고, 감동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다고 느꼈다.
그는 질병을 고치는 길은 사회를 고치는 데서 시작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캐나다 전역을 다니며 의료제도 개선을 위한 강연을 시작했다. 진심을 다한 그의 노력은 곧이어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노먼 베쑨이 시작한 캐나다의 의료제도 개혁은 오늘날 캐나다 의료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혈액봉투를 들고 스페인 내전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다
한편, 당시 유럽의 스페인은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민주적 절차를 거쳐 진보세력이 정권을 잡았지만, 구세력의 힘을 등에 업은 프랑코 군부의 쿠데타로 인해 내전 중에 있었다. 국제적으로 프랑코 세력은 당시 파시즘으로 치닫던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정작 정식 절차를 통해 정권을 잡은 스페인 정부는 불가침 조약을 핑계로 뒷짐만 지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외면 받고 궁지에 몰려 있었다. 스페인의 민주정권을 지지하던 세계의 진보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은 국제여단을 조직해 스페인을 돕기로 하였다. 이 국제여단을 지지하거나 참여한 사람으로는 피카소, 조지 오웰, 헤밍웨이, 브레히트 등 세계적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많았다.
흉부외과의사로 출세가도를 달리며, 캐나다 의료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노먼 베쑨에게 국제여단측에서 의료지원을 요청해왔다. 20대 청년시절 경험한 끔직한 전쟁에 환멸과 공포를 가지고 있던 노먼 베쑨이 또다시 전쟁터로 가는 것은 사실 그다지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그는 3주간 고민했다. 그는 머리보다는 자신의 가슴이, 그리고 한 명의 생명이라도 더 구해야 한다는 의사로서의 신념을 따랐다. 그는 이혼했지만 여전히 그의 인생에서 단 하나의 여인이었던 프란시스에게 유서를 남기고 스페인 내전에 뛰어들었다.
노먼 베쑨은 공화군 소속으로 이동야전병원을 개설하고 프랑코 군부에 맞서 싸우는 시민군을 치료하기 위해 내전 현장 이곳 저곳을 동분서주했다. 청년시절 처음 부상병 운송병으로 1차 대전에 참여했을 때와는 달리 46세의 노련한 의사가 된 노먼 베쑨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방법을 정확하게 알아냈다. 전쟁터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피 흘리는 사람들에게 수혈을 하는 것이었다. 노먼 베쑨은 전장에서 직접 수혈하는 방법을 개발해 자동차에 이동수혈대를 만들어 전장을 돌아다니며 현장에서 부상병들을 살려 냈다. 그의 이런 노력은 부상병의 사망률을 현격히 낮추었다.
스페인 내전 당시 노먼 베쑨이 만든 이동수혈대
1년간 종군 이후 노먼 베쑨은 필요한 물자를 구하기 위해 캐나다로 돌아왔다. 그는 캐나다 전역을 돌면서 스페인 내전의 실상을 알리는 강연회를 열고 지원을 호소했다. 그러나 노먼 베쑨을 비롯한 전 세계 자유주의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내전은 프랑코군부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스페인은 오래도록 프랑코의 독재정치 하에서 사회, 경제, 문화가 상대적으로 낙후된 국가로 남게 되었다.
의료 물자를 마련해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지만, 내전이 불행한 결과로 종결되면서 노먼 베쑨은 이제 확실히 자신이 의사로서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와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사회를 변혁하고 가난과 불평등으로부터 인간을 구해내는 일이었다. 그는 그 신념에 따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이든 하겠다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무렵, 노먼 베쑨에게 중국의 국부 쑨원의 아내이자 중국원조협의회 대표로 일으킨 만행은 난징대학살을 비롯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중국 내부의 정치상황도 변화시켰다. 오랫동안 정권을 갖기 위해 경쟁하고 갈등했던 국민당의 장제스와 공산당의 마오쩌뚱이 잠정적으로 휴전을 맺고 외부의 적인 일본에 함께 맞서기로 한 것이다. 이것이 제 2차 국공 합작이다. 국민당에 쫓겨 대장정 길에 올라 갖은 고초를 다 겪으면서도 살아남은 마오쩌뚱과 그의 병사들은 단단했다. 그들은 일본이라는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 국민당 군대의 제8로군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주로 맡은 지역은 허베이지역으로 일본 관동군과 직접 싸워야 하는 최전선이었다. 국민당의 장제스는 국공합작으로 공산당군대를 맞아들여 최전선에 배치함으로써 그들의 숫자가 줄어들어 괴멸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고 한다. 전쟁이라는 참혹한 상황 외에도 아군으로부터도 반쯤은 버림받은 8로군은 후방의 흡족한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군수품과 의료진은 늘 부족했다. 어린 부상병들은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죽어갔다.
그러한 때에 노먼 베쑨은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머나먼 동양의 나라에 의료시설이 전무할 뿐만 아니라 지원도 거의 없는 전쟁터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부상병들을 치료해달라는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중일전쟁이 일어난 이듬해인 1938년 중국에 도착했다. 그는 옌안에서 마오쩌뚱을 만난 뒤 허베이의 전선 한가운데로 뛰어 들어 죽어가는 병사들을 살리고 턱없이 부족한 의료진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인 의사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허베이의 야전병원에서 부상병을 치료하는 노먼 베쑨과 그가 양성한 의료진
그가 들어간 전선은 일본군에 둘러 싸여 완전히 고립된 지역이었다. 8로군은 이 지역을 지키기 위해 날마다 전투를 치르며 고군분투했고 날마다 부상병들이 속출했다. 노먼 베쑨의 손은 10개라도 모자랄 판이었다.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한꺼번에 3명을 수술하기도 하였다. 이즈음 국민당의 장제스는 공산당 세력이 늘어날 것을 우려하여 노골적으로 보급을 차단해 노먼 베쑨의 손에 닿는 의료품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노먼 베쑨은 미국과 캐나다에 중국의 상황을 알리고 의료품 지원을 요청했지만 그나마도 일본군에 포위된 상황에서 노먼 베쑨의 손이 쉽게 도달하지 않았다.
그래도 노먼 베쑨은 자신의 수술칼이 무뎌지지 않는 한, 한 명의 부상병이라도 더 살리겠다는 의지로 어린 중국 병사들을 치료해갔다. 피가 필요한 병사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자신의 피를 뽑아 수혈하기까지 했다(그의 혈액형은 O형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르친 중국인 의사들에게
“의사들이여 부상병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그대들이 먼저 그들을 찾아가시오”
라고 말했다. 지독하리만치 철저한 그의 헌신에 감동한 중국인들은 그를 백구은(白求恩)이라고 불었다. 그의 성 베쑨의 발음에서 착안한 것이지만, 은혜를 베풀어 사람을 구하는 백인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었다.
백구은, 즉 노먼 베쑨의 마지막 또한 감동적이었다. 노먼 베쑨은 다리가 짓이겨져 생사를 오락가락 하는 어린 병사를 수술하다 메스에 손가락이 베인다. 환자에게 쓸 소독약과 항생제가 부족한 현실이었기에 그는 상처 난 자신의 손가락을 치료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작은 상처는 곪아가기 시작했고 곧이어 패혈증으로 번졌다.
노먼 베쑨은 1939년 49세의 나이로 중국 허베이의 궁벽한 마을에서 자신이 미처 수술하지 못한 부상병들을 걱정하면서 죽어갔다. 일생을 정력적으로 그리고 불굴의 의지로 신념대로 살아간 한 의사의 장엄한 최후였다. 노먼 베쑨이 죽은 직후, 마오쩌뚱은 그를 기리는 헌사를 직접 써서 그를 애도했다. 그는 허베이에 있는 혁명열사의 무덤에 묻혔고 오래도록 중국인들에게 은혜로운 사람으로 기억되었다. 중국 장춘에는 베쑨의 이름을 딴 의과대학이 설립되었다. 캐나다에서도 노먼 베쑨을 기리는 기념관과 동상 등이 만들어졌다. 1990년에는 노먼 베쑨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중국과 캐나다에서 동시에 그를 기리는 기념우표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베이징 완핑청에 위치한 노먼 베쑨의 동상
사람이 자신이 가진 신념을 제대로 관철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지극히 힘든 일이다. 게다가 안락한 환경과 보장된 미래가 있다면 아무리 훌륭한 신념이라 하더라도 이를 선택하고 실천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노먼 베쑨은 자신의 삶이 가장 풍요롭고 명예로왔던 순간에 타인을 위한 생을 살겠다는 신념을 선택했고 이를 온몸을 다해 실천했다. 노먼 베쑨은 질병과 사회를 모두 치료하려 했던 진정한 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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