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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철 감독에 대하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본문
유상철 (柳想鐵, 1971년 10월 18일 ~ 2021년 6월 7일) 은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이자 현 지도자이다.
서울특별시 은평구 출생으로 응암초등학교, 경신중학교, 경신고등학교, 건국대학교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평소에 말이 적고 내성적인 성격과 성씨가 '유'씨인 것에 착안해서 '유비'라는 별명이 붙었다. 또는, 유독 한일전에서 좋은 기량을 발휘해 '한일전의 사나이'로 불리기도 한다.
1990년대 전반에 걸쳐 대한민국에 큰 영향을 준 선수 중 하나이다. 최전방 공격수부터 최후방 수비수까지 모두 뛸 수 있는 유틸리티 플레이어였다. 왼쪽 눈이 거의 실명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노력과 훈련을 통해 극복해 냈고 2002년 FIFA 월드컵에서 폴란드전에서 기록한 2번째 골을 통해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의 월드컵 첫 승과 4강 달성에 일조했다.
2009년 춘천기계공업고등학교의 감독직을 맡으면서 첫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고, 2011년 7월 왕선재의 후임으로 대전 시티즌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첫 프로 감독직을 수행하게 되었으나 2012년 시즌 후 재계약에 실패한 후 팀을 떠났다. 2014년 초 울산대학교 축구부 감독으로 임명된 후 2014년과 2015년 1, 2학년 대학 축구대회에서 2년 연속 팀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또한 2015년 전국체육대회 남자 축구 대학부에서도 준우승을 기록했으며 2017년 48회 추계대학축구연맹전에서도 팀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2017년 12월 4일 전남 드래곤즈의 감독으로 정식 임명되면서 5년만에 K리그로 돌아왔다. 2019년부터 인천 유나이티드 FC의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2021년 6월 7일 오후 7시 20분, 췌장암 투병 끝에 서울아산병원에서 별세하였다.
학력[편집]
클럽 경력[편집]
건국대학교를 졸업하고 1994년 울산 현대의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주로 미드필더 포지션에서 활약하였으나, 1998년 월드컵이 종료된 이후엔 부진한 공격진에 고심하던 고재욱 감독에 의해 최전방 스트라이커로 기용되었으며 그 해 K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1999년 J리그의 요코하마 F. 마리노스로 옮겨 2000년 J리그 준우승에 이바지한 뒤, 2001년 가시와 레이솔로 이적하여 활약하였다[1].
2002년 10월 시즌 종료까지 8경기를 남기고 있던 친정 팀 울산 현대로 복귀하였다.[2] 팀의 우승을 위해 남은 8경기에서 경기마다 1골을 넣어 전승을 기록하겠다는 말을 남긴 유상철은 이 8경기에서 9골을 기록하는 엄청난 활약을 보였다. 특히 부산 아이콘스와의 K리그 2002 최종전에서는 혼자 4골을 넣으며 팀의 4-2 승리를 이끌기도 했다. 이 시즌 울산은 우승컵을 들지 못했지만, 유상철의 활약으로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2003년 6월 요코하마 F. 마리노스로 다시 이적해[3] 2003년과 2004년 팀의 J리그 2연패에 이바지한 뒤, 2005년 울산 현대로 재복귀하여[4] 그 해 K리그 우승에 이바지하였다.
하지만 고질적인 무릎 부상을 앓아[5] 2006년 3월 12일, 상무와의 K리그 홈 개막전을 끝으로 본인이 선수 생활을 시작한 울산 현대에서 선수 생활을 마쳤다.[6]
국가대표팀 경력[편집]
1994년 3월 5일 미국과의 친선 경기에서 데뷔했으며, 월드컵에는 1998년 FIFA 월드컵, 2002년 FIFA 월드컵에 2차례 참가하였다. 1994년 아시안 게임 8강전이었던 일본전에서는 후반전에 동점 골을 득점하며 A매치 데뷔골을 신고했으며, 황선홍과 함께 역전승을 합작했다. 첫 월드컵이었던 1998년 FIFA 월드컵에서는 네덜란드전 대참패로 차범근 감독이 경질되어 분위기가 나쁜 상태에서 맞이한 파리 벨기에전에서 후반 26분에 하석주의 프리킥을 받아 동점 골을 넣으며 월드컵 데뷔골을 신고했다. 2002년 FIFA 월드컵 예선 1차전 폴란드전에서 중거리 슛으로 골을 넣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대한민국의 4강 진출에 이바지했다. 월드컵에서 통산 2골을 기록했다.
2005년 3월 30일, 우즈베키스탄과의 122번째 A매치 경기가 자신의 마지막 국가대표 경기가 되었다. 2006년 5월 26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의 경기 하프타임에 은퇴식을 가져 공식적으로 은퇴하였다.[7]
유상철은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들 중 4번째로 센추리 클럽에 가입한 선수이다.
지도자 경력[편집]
2009년 춘천기계공업고등학교 축구부 초대 감독을 맡았다.[8]
그리고 2011년 시즌 중반 왕선재 감독이 승부조작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한 후 대전 시티즌의 감독직에 취임하였고,[9] 승부조작 사태로 어수선한 팀 분위기를 추슬러 리그 최하위를 면하는데 성공하였다. 총 2시즌 동안 대전에서 감독 생활을 하며 2012 시즌 1부 리그 잔류를 성공시켰지만, 재계약 제안을 받지 못하고 팀을 떠났다.[10]
2014년 초 울산대학교 축구부 감독으로 취임했다.
2016년을 끝으로 윤정환 감독이 울산 현대와 결별을 확정 짓자 유력한 후임감독으로 거론되었다.[11]
2017년 8월 최윤겸 감독이 강원 FC 감독직에서 물러나자 유력한 후임 감독으로 거론되었지만 성사되지는 않았다.[12]
2018년 전남 드래곤즈의 감독으로 부임하였지만 부진하면서 팀의 순위가 강등권까지 떨어지자 8월 16일 결국 구단에 사임 의사를 밝혀 감독직에서 내려왔고, 이후 전남은 강등되었다.
이후 대한축구협회의 국가대표전력강화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어 잠시 행정가로 일하다가 2019년 5월 14일 인천 유나이티드의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하지만 도중 췌장암 4기가 발견되었지만 그래도 시즌 끝까지 팀을 이끌어 잔류를 이끌었고 치료전념을 위해 2020년 1월 2일 사임하였다. 이후 인천 구단측에는 구단의 명예감독으로 유상철을 임명했다.[13]
플레이 스타일[편집]
K리그 베스트 11에 수비수(1994년), 미드필더(1998년), 공격수(2002년) 부분에 모두 선정된 경험이 있고, 1998년 K리그 득점왕을 차지하기도 했을 정도로 최전방 공격수, 공격형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윙백, 중앙 수비수 등 대부분의 포지션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다재다능한 '만능 멀티 플레이어'로 널리 알려져 있다.[14] 화려하지는 않지만 수비수의 근성과 미드필더의 재간, 스트라이커로서의 결정력을 동시에 갖추었고, 대인마크 능력을 키웠다.
중거리 슛이 뛰어나며, 탄탄한 체격을 바탕으로 좀처럼 큰 부상을 당하지 않았던 점 또한 유상철의 강점 중 하나이다.
그 외[편집]
2003년에 자신의 이름을 딴 장학재단을 설립[15]하였으며, 2005년에는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진행하는 '2005 K-리그 유소년클럽캠프'에 참가하기도 하였다.[16] 은퇴 후 2006년에는 축구 해설자로 데뷔하여 활동하기도 하였고[17], 해피 선데이의 날아라 슛돌이 코너에서 감독(2기부터 5기까지)을 맡기도 했으며, 2008년 MBC 일일연속극 사랑해, 울지마를 통해 연기자로 데뷔하였다. 탤런트 김혜정의 조카이기도 하다. 가족관계로는 어머니인 이명시 여사와 아내인 최희선씨 그리고 슬하의 1남 1녀를 두고 있다.
에피소드[편집]
- 유상철은 왼쪽 눈이 거의 실명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히딩크 감독이나 동료 선수들 심지어 가족들에게도 눈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숨긴 채 지내다가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알고 나서 `자신의 한쪽 눈을 주겠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힘입어 남들보다 배로 더 힘들게 훈련에 임했으며, 그 후 2002년 FIFA 월드컵 당시에 소중한 1골을 터뜨려 국민들의 꿈을 일으켜 주었다. 이 이야기는 2010년 6월 8일 예능 프로그램 강심장에서 처음 밝혀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다.[18]
- 2019년 11월에 췌장암 4기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진단을 받은 후 축구 팬들에게 쓰는 편지에서 "긍정의 힘으로 병마와 싸워 반드시 이겨내겠다"고 밝혔다.[19] 요코하마 F. 마리노스 팬들은 팀의 주역 중 하나였던 유상철의 투병 소식이 전해지자, 쾌유를 빈다고 전했다.
2021년 3월 유상철의 위독 소식이 전해지자 유상철은 스스로 위독하지 않다고 해명했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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